SF영화의 고전이 된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의 첫 장면은 인상적이다. 카메라는 밤하늘에 높이 떠 멀리 도시의 야경을 보여준다. 무수히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지만, 점점 카메라가 다가가면서 비추는 도시의 모습은 낯설고 이질적이다. 주기적으로 내뿜는 불기둥, 늘 어두운 거리, 끊임없이 내리는 비, 허름한 행인들, 온통 어둡고 암울하다. 어두운 도시를 비추는 건 햇빛이 아니다. 대신 고층건물의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요란하게 거리를 비춘다.
30년 전, <블레이드 러너>가 예견했던 거리의 스크린들이 현실이 되고 있다. 서울역을 마주한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는 밤이면 거대한 스크린으로 바뀐다. 강남대로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미디어폴(Media Pole)이 행인들의 시선을 끈다. 뿐만 아니다. 크고 작은 스크린들이 우리 주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대형마트에서는 진열대마다 작은 스크린이 상품을 광고하고, 엘리베이터에서는 또 다른 스크린이 소식을 전한다.
-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이러한 집 밖의 스크린들은 옥외광고물의 연장선에서 비롯되었다. 고속도로나 건물 옥상에 설치된 광고탑을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형 광고판은 개별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정해진 문구와 그림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고, 내용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올라가 떼어내고 붙이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디스플레이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이 대형 간판들은 스크린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주로 광고와 홍보용으로 많이 이용되었기 때문에 전자간판 또는 전자포스터 등으로 불린다. 이 스크린들은 기존의 옥외간판과 달리 보드의 내용을 수시로 다양하게 바꿀 수 있다. 또, 사진이나 텍스트만이 아니라 동영상을 올리는 것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개별적으로 제어된다.
이러한 옥외 스크린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원격지에서 통합적으로 제어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디지털 사이니지(digital signage)’다. 지하철 역이나 엘리베이터 내에 설치된 수 백, 수 천 개의 스크린을 한꺼번에 관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텔레비전처럼 동일한 영상이나 콘텐츠를 여러 스크린에 내보낼 수 있게 된다.
또한, 디지털 사이니지는 단순한 광고간판과 달리 다양한 양방향 서비스가 가능하다. 이용자가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이용할 수도 있고 피드백을 줄 수도 있다. 컴퓨터처럼 인터넷을 이용한 검색도 가능하고 원하는 분야의 뉴스를 골라서 볼 수도 있다. 지도를 확대 축소해가며 특정 위치를 탐색할 수도 있고, 사진을 찍어 이메일이나 스마트폰으로 보낼 수도 있다.
TV는 반세기 이상 대중적인 미디어로 거실을 차지해왔다. TV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손쉽게 즐길 수 있는 휴식도구다. TV는 대개 쇼파에 기대거나 누워서 단지 ‘시청’하는 방식으로 이용된다. TV수상기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편안한 자세로 즐기는 미디어다. 반면, PC는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이용하는 미디어다. 모니터를 향해 몸을 기울인 자세로 집중해야 한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지속적으로 타이핑을 하고 클릭을 해야 이용할 수 있는 미디어다.
PC에 열중하다가 피곤해지면 TV를 보며 휴식을 취한다. 사람들에게 TV와 PC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용되는 미디어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TV도 PC처럼 다양한 양방향 콘텐츠를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들은 과감하게 TV용 쿼티자판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외면으로 얼마 못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들과 달리 나는 TV와 PC가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공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하루 종일 높은 집중상태를 유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PC처럼 높은 집중상태에서 구체적 목적을 가지고 이용하는 미디어가 있다면, 상대적으로 낮은 집중상태에서 이용할 수 있는 TV와 같은 미디어가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변화하는 인간의 집중정도에 따라 각기 다른 유형의 미디어가 존속할 가능성이 높다.
핸드폰의 등장은 미디어의 이용을 옥외로 확장시켰다. TV와 PC는 집안이나 사무실과 같이 건물 내부의 정주(定住) 공간에서 이용하는 미디어다. 과거 소형TV가 나온 적도 있고, 노트북이 널리 보급되었지만 여전히 TV와 PC는 거실과 책상에서 이용된다. 반면, 핸드폰은 거리, 차량 내부, 건물 로비 등 이용공간의 제한이 거의 없다. 아울러,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TV나 PC와 콘텐츠나 기능의 차이가 사라졌다. PC처럼 검색도 하고 이메일도 주고받는다. 즉, 스마트폰은 높은 집중상태에서 이용하는 옥외용 미디어이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범주의 미디어가 남았다. 옥외에서의 낮은 집중상태를 겨냥한 미디어다. 옥외공간에서는 높은 집중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거리를 걸으면서 스마트폰에 시선을 주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보행 중에도 낮은 집중상태의 미디어 노출은 가능하다. 광고주와 광고업계로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유인할 좋은 기회가 된다. 반면, TV나 PC의 매력도는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미디어 이용에 익숙해질수록 이용자들이 의도적으로 광고 노출을 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용자들은 채널을 수시로 바꾸거나 팝업창이 뜨지 않도록 설정한다. 그런 탓에 높은 비용을 감안하면 TV와 인터넷의 광고효과는 점차 하락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사이니지는 단순히 옥외광고가 발전한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광고매체로서의 기능은 중요하다. 그러나, 옥외공간의 낮은 집중상태를 겨냥한 새로운 미디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랬을 때 더욱 다양한 콘텐츠의 기획과 개발이 가능하고 시장과 관련 산업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특히, 다양한 센싱기술을 응용한 기발한 디지털 사이니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일본에서는 얼굴인식 센서로 구매자의 성별과 나이를 판단하여 음료를 추천하는 자동판매기가 등장했다. 영국에서는 눈과 입 모양을 보고 이용자의 감정상태를 6가지로 구분하여 각기 다른 광고를 제공하는 디지털 사이니지가 시도되고 있다. 지역, 날씨, 이용자의 성별과 나이, 심지어 감정상태에 따라 맞춤형 콘텐츠와 정보를 제공하는 기술이 가까운 미래에 상용화될 것이다.
디지털 사이니지 분야는 아직 미개척 분야다. 우리나라의 IT인프라와 디스플레이 기술, 콘텐츠 기획력이면 충분히 도전해볼만 하다. 무엇보다 다양한 분야의 사업자들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아울러, 모바일 생태계와 같은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부의 선도적인 리더십이 발휘될 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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