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5월 07일
<2009년 4월> 가난한 과학, 가난한 방송, 가난한 콘텐츠
영국의 BBC와 일본의 NHK, 미국의 PBS 등의 방송사들은 저마다 언제 어디서든 내세울만한 과학시리즈물을 가지고 있다. PBS의 <노바(NOVA)> 시리즈는 딱딱하고 지루하기만 한 과학을 이렇게 영상물로 만들어 낼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끈이론이나 양자역학 등 만만치 않은 과학 소재들까지 그들의 손을 거치면서 새롭게 탄생한다. BBC의 <휴먼(Human)> 시리즈도 그렇다. 인체를 소재로 한 아이디어와 영상이 놀랍고, 이런 프로그램이 선풍적 인기를 끄는 사회적 분위기와 시청자가 부럽다.
이 방송사들은 모두 공영방송들이다. 이들이 과학 프로그램을 만들고 투자하는 것은 다른 방송사들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윤을 확보해야 하는 상업 방송사들은 과학 프로그램에 관심을 두기 어렵다. 과학 프로그램보다는 오락프로그램이 시청률도 높고 광고주를 구하기도 쉽다. 제작비만 많이 들고 시청률도 바닥을 기는 프로그램이 과학 프로그램인 것이다.
예컨대, 과학처럼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데는 컴퓨터 그래픽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러나, 한 시간 분량의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20억 내지 30억원 가량의 비용이 필요하다. 시청자들이 많이만 본다면 그 정도의 예산을 확보한다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관심 없고 선호하지 않는 프로그램에 그만한 투자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
시장의 논리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장르인 만큼, 공익성을 보다 강조하는 공영방송들이 떠맡은 것이다. 그러나 앞에 열거한 방송사들은 의무감의 차원을 넘어 프로그램의 질은 물론이고 상업적으로도 성공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공영방송들이 과학 프로그램을 편성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청자들의 접근성 때문이다. 누구나 가장 쉽게, 추가적인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볼 수 있는 것이 공영방송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공영방송이 내세울만한 과학 프로그램을 쉽게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몇 개의 프로그램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단발성 프로그램들이다. 정규편성의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아야, 인력을 키우고 경험과 노하우를 쌓을 수 있다. 한국의 공영방송에서 과학프로그램이 탄생하고 생존을 유지하기는 어려운 과제였던 것 같다.
2007년 9월 17일 첫 방송을 내보낸 <사이언스TV>에 거는 기대는 컸다. 무엇보다도 과학콘텐츠 전용의 미디어를 갖게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고정 편성되는 과학 프로그램도 여럿 생겨나고, 과학자들이 인터뷰·좌담·토론에 참여할 기회가 늘어나고, 과학 전문 작가, 피디도 많아지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리 리모컨을 눌러도 첫 방송을 시작했다는 <사이언스TV>를 볼 수가 없었다. 출범 첫해, 위성방송으로만 시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언스TV>는 콘텐츠를 공급하는 채널사용사업자에 해당한다. 따라서, 방송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케이블이나 위성 등 플랫폼 사업자를 통해야 하는 데 그들과의 계약이 원활하지 않았던 탓이다. 2008년과 2009년에는 연이어 공익채널로 선정되어 그나마 한 숨 돌린 셈이 되었다. 공익채널은 모든 지역 케이블 방송국(SO)들이 의무적으로 송출해야 한다. 그러나 지역별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사이언스TV>는 60 내지 70번대의 채널에 편성되어 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 상대적으로 비싼 케이블TV 상품을 선택한 가입자만 시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과학콘텐츠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미디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의는 크다. 짧은 기간이지만 <사이언스TV>는 과학채널로서 상당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10년 이상 보도전문채널로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YTN이 투자·운영하고 있다는 점은 큰 잇점 이다. YTN의 인력과 장비를 활용함으로써 다른 어떤 채널보다도 단기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이언스TV>의 제작비 규모는 놀라움 그 자체다. 30분짜리 자체제작 프로그램의 제작비가 2백만원대, 50분짜리 외주제작 프로그램이 천만원 미만이라고 한다. 이 제작비로는 양질의 프로그램을 기대할 수 없다. 방송시간을 채운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울 정도다. 이런 환경에서 <이무송, 정혜신의 토마토>나 <최은정의 사이언스 쇼> 같은 가능성이 엿보이는 프로그램들을 일궈낸 제작진의 노력이 감동적일 뿐이다.
지상파 방송 드라마의 1회 제작비가 1~2억원 규모인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출연료도 안 되는 수준이다. 이럴 거라면 굳이 과학채널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리모컨만 누르면 나오는 <디스커버리 채널>이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훌륭한 과학 프로그램들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제작비는 프로그램의 질을 결정하는 첫 번째 요소다. 오죽하면 <노바>의 제작진은 프로그램 기획을 마치고 자금조달을 위해서만 4년의 시간을 보내겠는가. 싸구려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산이 제한되다 보니, 프로그램의 포맷까지 제한되고 만다. <사이언스TV>의 자체제작 프로그램은 소형 스튜디오를 벗어나지 못한다.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는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모양이다. 대형 프로그램들은 전적으로 해외구매에 의존하고 있다. 외국의 드라마, 다큐멘터리,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의 사이사이에 국내의 가벼운 토크쇼 형식의 프로그램들이 끼워있는 형식이다.
<사이언스TV>의 본방비율은 2008년 기준으로 12.5%에 불과하다. 재방, 3방에 해외 구매 프로그램으로 채워진 과학채널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다. 과학콘텐츠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과학채널은 단지 프로그램의 편성기능에서 벗어나 과학콘텐츠 생산기반이 다져지도록 기획하고 견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콘텐츠가 없는 방송은 자동차 없는 고속도로나 마찬가지다. 과학 콘텐츠에 적극적이고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그 선두에 <사이언스TV> 나서줘야 한다. 또한, 우리 사회 전체가 나눠져야 할 책무를 <사이언스TV>가 대신하고 있는 만큼, 외면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정부는 과학채널을 출범시킨 것으로 할 일을 마쳤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과학콘텐츠 제작시장이 활성화되고 자립기반을 갖추도록 지속적으로 살피고 진흥시키는 것은 채널의 출범보다 더 중요하다. 또한, 콘텐츠의 유통과 활용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과학기술과 교육 행정조직 통합의 시너지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진다.
또한, 과학지식이 보편적 지식이듯, 과학콘텐츠는 전 세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보편적 콘텐츠다. 즉, 전 세계 어느 곳이든 팔아먹을 수 있는 상품인 것이다. 한국의 과학콘텐츠가 <디스커버리 채널>이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혹은 BBC에서 방영되는 것,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 아닌가. [끝]
# by | 2009/05/07 11:42 | <과학과기술>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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