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7일
<2009년 10월> 과학관이 변해야 하는 이유
신문과 방송만이 미디어가 아니다. 나의 생각과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는 것이면 모두 ‘미디어’다. 신문과 방송뿐 아니라 책, 잡지, 홍보전단, 거리의 벽보, 홈페이지, 인터넷 게시판 등이 모두 미디어인 셈이다. 일상의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를 통하게 된다.
미디어를 거치지 않는 경우는 상대방과 마주 앉아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특별한 경우뿐이다. 대면대화(face-to-face communication)의 상황에서도 상대방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 전한다면 그가 곧 미디어의 역할을 하는 셈이 된다. 자신의 직접 경험이 아닌 보고 들은 사건의 이야기를 전한다면 마찬가지다.
과거의 촌락사회에서는 마을의 수다쟁이 아줌마가 최고의 미디어였다. 개울가 빨래터에서 사랑방에서 그녀를 통해 동네의 온갖 소식들을 들을 수 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은 또 하나의 중요한 미디어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마을에서 벌어졌던 사건들과 사람들의 과거에 대한 정보를 기억으로 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다쟁이 아줌마가 동네 구석구석 심지어 이웃동네로까지 소식을 퍼뜨리는 공간적 미디어라면, 마을의 노인은 과거의 정보를 현재로 전달하는 시간적 미디어인 셈이다. 물론, 이러한 ‘인간미디어’는 신문과 방송 같은 현대적 의미의 미디어에 비하면 초라하다. 수다쟁이 아줌마의 주책은 이웃마을을 넘어서기 어렵고, 노인의 기억은 기껏해야 백년 안쪽으로 움츠러든다.
특히, 사회적 영향력이나 파급력 측면에서는 신문과 방송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내가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맞춤형 정보를 전해주는 것은 인간미디어다. 그것은 촌락사회에서뿐 아니라 인터넷과 초고속통신망을 끼고 사는 현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아파트 부녀회장이 관리비를 떼어 먹었다는 걸, 이웃집 부부가 밤새 싸웠다는 걸, 새로 온 기획부 김 부장의 성격이 괴팍하다는 걸 알려주는 건 신문이나 방송이 아니라 ‘인간미디어’들이다.
그런데, ‘과학’이라는 이야기 거리를 놓고 보면 도무지 신문과 방송 같은 매스미디어나 인간미디어 둘 다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신문과 방송은 활자와 영상이라는 틀을 기본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참을 이리저리 설명해도 알기 어려운 내용을 문자만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추상적인 이론의 세계를 영상으로 담아낸다는 것도 만만치 않다.
매스미디어 고유의 시간적 제약도 과학의 중개자 역할수행을 버겁게 한다.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 마감(제작)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것부터가 부담이다. 진지하지 않은 시청자(독자)들을 정해진 시간에 진득하니 붙잡아두기도 쉽지 않다. 그들은 신문을 펼치거나 텔레비전을 켜면서 머리 아픈 공부보다는 여유로운 휴식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과학을 다루는 인간미디어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과학자와 같은 ‘전문가 미디어’와 ‘일반인 미디어’다. 전문가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을 예외로 하면, 과학자의 대중강연 같은 경우가 전문가 미디어의 사례가 된다. 이들은 연구활동이라는 본업이 있는 탓에 일반인을 향한 미디어로서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일반인 미디어에게 ‘과학’이라는 주제는 낯설기만 하다. 정치나 종교, 스포츠나 연예에 비해 과학은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는다. 전문적인 교육이 지속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과학의 ‘소통’ 전문가라는 새로운 전문가 미디어를 적극 육성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이처럼 과학은 매스미디어나 일반 미디어 모두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운 분야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는 흔하지 않은 훌륭한 미디어가 있다. ‘과학관(science museum)’이라는 미디어다. 과학관은 텔레비전처럼 쇼파에 앉아 리모컨을 누르는 것만으로 접할 수 없다. 작정을 하고 차를 타고 찾아가야 한다. 대중매체에 비해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마음먹고 준비가 된 적극적인 수용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소통의 효율은 훨씬 높아진다.
미디어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시간의 제약도 훨씬 느슨하다. 과학다큐멘터리나 뉴스, 과학강의처럼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다. 하루 종일 과학관을 꼼꼼히 둘러봐도 되고 한 시간 만에 관람을 끝낼 수도 있다. 다리가 아프면 중간에 쉴 수도 있고, 출출하면 중간에 햄버거를 사먹기도 한다. 내 맘대로 보고 싶을 때 보고 싶은 만큼 보면 된다.
또한, 과학관은 활자나 영상, 음성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입체적 모형을 만들어 여러 방향에서 살펴보도록 할 수도 있고, 직접 만져보고 만들어보거나 간단한 실험과정을 따라하도록 할 수도 있다(사진1). 스크린이 아니라 실물을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다는 것은 ‘과학관’이라는 미디어의 독보적이고 중요한 장점이다.

과학관은 덩그러니 세워진 건물이나 딱딱하고 지루한 공공기관이 아니다. 과학을 전달해주고 중개해주는 미디어다. 과학관을 미디어로 바라보면 왜 과학관이 변해야 하고 어떻게 변해야 할지에 대한 해답이 보이기 시작한다.
먼저, 논평하고 해설해야 한다. 과학을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살을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 사실만을 전하는 미디어는 결국 외면 받는다. 인간미디어나 매스미디어나 모두 그렇다. 뻔한 연애 이야기나 군대 이야기지만 그의 입을 통하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3대0의 경기 결과를 알기 위해서라면 굳이 텔레비전 앞에서 긴 시간을 버틸 이유가 없다.
과학은 ‘검증된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정확한 전달에 초점을 두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교과서와 전문서적으로 충분하며 과학관이 그것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과학관은 일반인을 위한 미디어다. 이야기의 살을 붙이고 가공하는 것은 미디어의 중요한 역할이고 권한이기도 하다. 물론, 사실에 대한 왜곡과 오해의 부작용은 경계해야 한다.
예컨대, 인체의 뼈 모형을 전시한다고 하자. 관람하기 편하도록 똑바로 선 자세의 뼈 모형에 각각의 이름과 기능을 써 붙이는 것은 ‘사실’의 전달에만 충실한 것이다. 그런 모형은 백과사전과 인터넷에 넘쳐난다. 미국의 한 과학관은 마주 보고 있는 두 대의 자전거 한 쪽에 뼈 모형을 앉혀 놨다. 다른 한 대의 자전거에 올라타서 페달을 밟으면 마주 보고 있는 뼈들이 같이 움직인다(사진2). 뼈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고안한 전시물이다. 
과학관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 명확해야 한다. ‘매스’미디어조차 무차별적인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매체에 따라 내지는 개별 콘텐츠에 따라 소구하는 대상이 구체적이다. <조선일보>가 목표로 하는 독자와 <한겨레>가 목표로 하는 독자는 다르다. ‘개그콘서트’와 ‘전국노래자랑’이 상정하는 시청자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온 국민을 만족시키려는 과학관은 결국 단 한 사람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초등학생과 성인의 과학지식이 같을 리 없고, 이공계생과 인문계생의 관심정도가 비슷할 리 없다. 구체적으로 어느 연령대의 어떤 수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면밀히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나이 또래에는 무엇에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 그 사람들이 최근의 관심사는 무엇인지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개인의 관심사나 고민거리와 동떨어진 전시물은 외면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그들의 관심거리에 따라 과학관이 바뀌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과학관, 변화하는 과학관이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끝]
# by | 2009/10/27 10:23 | <과학과기술>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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